누구랑 춰야 하나...
예상보다 첫인상이 다소 실망스러웠던 Lisbon tuga tango marathon (리스본 투가 탱고 마라톤)의 첫날, 유난히 눈에 띄는 남자가 있었다. 얼굴도 잘 생겼지만 무엇보다 춤이 매우 스타일리시해 보였다. 첫날 밀롱가는 대부분 초급 어르신들이 많아서 이 남자 유달리 더 돋보였다. 일단 저 남자 찜! 그런데 콧대 높을 거 같아. 쉽지 않겠는데?... 이리저리 기회를 엿보다 두 번째 밀롱가에서 드디어 까베세오에 성공했다. 예상대로 그 남자와의 한 딴다는 매우 즐거웠고, 콧대가 높을것라고 생각했던 이 남자는 굉장히 유쾌하다. 그 후에는 볼 때마다 장난을 치고 이야기를 건다.
"나 애 봐야 되서 보통 밀롱가에 잘 못 와. 그래서 페스티벌 같은 거 맘먹고 오면 정말 열심히 놀아야 돼."
"뭐? 너 굉장히 어려 보이는데 애 아빠였어?"
"정말? 기분 너무 좋은데? 하하하"
남자고 여자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려 보인다는 얘기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한다. 그리고 D는 실제로도 매우 어려 보였다.
D는 아테네에서 왔다. 어쩐지 춤을 매우 잘 추더라니... 아테네에 살다가 리스본에 처음 온 순간 이곳이 내가 살 곳이라고 느꼈다고 했다. 그리고 지금은 예쁜 아내와 귀여운 아들과 함께 리스본 근교에서 지내고 있다. 익살스러운 눈빛과 말투와는 달리 얘기를 하면 할수록 D는 탱고에 대해서 굉장히 진지했다. 처음 본 나에게 탱고에 대한 자기의 생각과 사람들에게서 느끼게 되는 감정 그리고 자기의 사업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(매우 빠른 영어로) 영어가 약한 나는 반은 알아듣고 반은 못 알아듣고.. 안되겠어. 통역이 필요해. 춤추느라 바쁜 남편을 찾아서 우리 다음에 차 한잔 하면서 더 깊은 얘기 해보자 약속을 잡았다.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밀롱가에서 D와 몇 번의 딴다를 더 추게 됐는데 D는 탱고를 출 때 매우 진지했다. 진지하다는 것이 단순히 미간에 주름을 잡고 묵직하게 무게를 잡았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곳을 그 곡의 분위기에 맞춰 최선을 다했다는 의미이다. 밝고 경쾌한 곡에서 D는 최선을 다해 신났고, 가슴을 울리는 애잔한 선율에서는 최선을 다해 애잔했다.
그렇게 탱고 마라톤이 끝나고 우리는 아침부터 햇빛이 쏟아지던 날 다시 만났다. D의 집이 있는 리스본 외곽 Sao Pedro do Estoril 였다. 그곳에서 D는 자기가 매일 명상을 한러 나온다는 바닷가에 우리를 데려갔다. 파도가 코 앞까지 크게 물보라를 치면서 밀려왔다. 이곳에 혼자 앉아서 많은 생각을 한다고 했다. 그런데 D... 여기서 명상할 때 눈은 감지 마. 파도가 세서 쓸려 가겠어 ㅋㅋ. 하던 일까지 그만두고 탱고 관련 사업을 전업으로 하고 있다는 그의 이야기가 궁금했다.
D는 굉장히 바쁜 마케팅 전문가였다고 한다. D의 회사는 유럽에서 가장 큰 마케팅 회사였는데 그곳에서 그는 꽤 잘 나가는 사람이였다. 당연히 그가 맡은 프로젝트는 많아졌고 일 욕심이 많던 그에게 스트레스도 그만큼 많아졌다고 한다. 그러던 어느 날 D는 갑자기 가슴에 통증을 느끼면서 쓰러졌다. 젊은 그에게 심장마비가 온 것이다. 그가 매일 일에 매진하고 스트레스에 노출되는 사이에 그의 심장은 혹사당하고 있었다. 그는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.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곁에 더 오래 있고 싶었기에 그 후 일을 그만두고 그의 삶을 180도로 바꾸었다. 식습관을 채식 위주로 바꾸고 한가한 근교로 이사를 와서 자신의 몸과 마음에 집중했다. 내가 어떤 것을 할 때 행복할까 그리고 내가 그중 무엇을 잘할 수 있을까 다시 한번 자기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. D는 탱고를 춘다 그것도 상당히 수준급 댄서였다. 그는 탱고를 추면 행복했고 탱고를 출 때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심장소리가 안정되면서 치유되는 느낌을 받는것을 알게됬다. 이거야! 그는 이런 모멘트를 남들도 느끼고 있을까? 춤을 추면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. "당신은 왜 탱고를 추죠?"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면서 탱고가 우리에게 주는 긍정적인 면에 대해서 점점 더 많은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. D는 그런 이야기들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어 졌다.
그리고 지금 D는 탱고 관련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. 탱고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공유 숙박, 흔하게 만날 수 없는 탱고 마에스트로들의 탱고 노하우, 그리고 기존의 자신의 전문 분야인 탱고 행사 마케팅까지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플랫폼을 만들어서, 그 안에서 사람들이 탱고를 더 쉽게 접하고 더 빨리 배워서 더 많이 즐길 수 있게 하는 것이 그의 목표이다. 그의 플랫폼은 물론 아직 완전하지 않지만 그는 계속 꿈꾸며 살을 붙여가고 있다. 그리고 그 과정은 D의 심장에 스트레스보다는 치유효과를 주는 것이었다.
이야기를 하는 내내 D의 눈은 빛났다. 마치 우리가 꿈 많은 어린 시절 만화가게 주인이나, 대통령, 과학자를 꿈꾸며 얘기했던 그 시절의 신나던 눈망울이 생각났다. 그리고 진지했다. 나는 이토록 눈동자를 반짝이면서 꿈을 얘기해본 때가 언제였을까? 물론 당신은 D가 마케팅 전문가였으니까 이것도 마케팅의 일환일 거라고 말할 수도 있다. 하지만 D의 집 뒷마당에서 D의 아내가 만들어준 샐러드와 건강빵을 먹으면서 D는 티를 마시고 우리는 커피를 홀짝였다. D의 반짝이는 눈망울은 그의 꿈을 듣고 있던 우리의 눈동자도 탱고 안에서 또 다른 꿈을 꾸게 해 주었다.
D의 꿈을 진심으로 응원하며..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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